본문 바로가기
잡다한 사진

큰황새풀 (월간 난세계 17년 9월호)

by 태극농원쥔장_한현석 2017. 9. 3.
728x90








씨앗이 감상의 대상인 ‘큰황새풀’


이름만 들어보면 우아함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야생화가 있다. 너무 멋진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큰황새풀’이다. 비슷한 종류로 ‘황새풀’이라 부르는 야생화도 있다.

야생화에 관심이 많은 취미가들 사이에서 황새풀은 간혹 길러지고 있거나 판매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에 반하여 큰황새풀은 시중에서 볼 수 없고 식물에 대한 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은 것 같다.

황새풀이나 큰황새풀이 아이러니(irony)한 것은 원만한 야생화들이 예쁜 꽃을 감상하기 위해 기르거나 가을의 열매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길러지고 있는데 이 품종들은 씨앗을 감상하기 위하여 길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흰색의 솜뭉치 같은 씨앗을 자생지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화려함은 없지만 무엇인가 자연의 신비함을 느낄 수 있고 황새들의 춤사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옛 어른들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황새풀이라 불러준 것 같다.

.

이 ‘큰황새풀(Eriophorum latifolium)’을 처음 만난 것은 백두산 식물들의 정보가 부족한 시절인 15~20년 전쯤에 백두산의 식물들을 직접 만나고 확인하며 사진을 찍고 정보를 축적할 무렵에 백두산의 소천지 인근 습지에서 황새풀을 만나고 다음번 탐사 때 황새풀을 다시 만나려고 소천지 인근의 자생지를 찾아갔지만 계절이 너무 늦어 황새풀은 모두 비바람에 씨앗이 날려 보기 어려웠고 큰황새풀들이 흰 씨앗을 바람에 날리며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백두산 소천지 인근 습지에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

이렇게 백두산에서 ‘황새풀’과 ‘큰황새풀’을 만나며 사진 자료와 자생지 환경들을 조사하고 다니며 사진만 들고 오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씨앗을 채집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큰황새풀이 자라는 장소는 습지이기 때문에 장화를 준비하지 않고서는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씨앗을 채집하려는 시도도 하지 못하고 그저 사진기에 담기 바쁜 날들만 이어졌다.

그러던 중 백두산의 식물탐사에 어려움이 닥쳐버렸다. 백두산에 들어갈 때 입장권만 구입하면 택시나 자가용 차량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던 것이 어느 순간 백두산 내를 운행하는 직영버스와 짚차만 이용이 가능하고 차량이 중간에 정차하지 못하고 정차하는 장소까지 정해지는 등 일반인들이 백두산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게 되니 식물탐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며 16회 탐사에 총150일의 백두산 식물탐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백두산을 오르지 못하며 큰황새풀에 대한 기억도 서서히 잊어져가고 있었다.

.

백두산 고산지역 식물 탐사를 못하게 되었지만 고산 지역의 식물탐사를 이어가기 위하여 다른 지역을 물색하던 중 중국의 내몽고 오지 초원이 고산식물의 식물탐사 장소로 적합하다는 정보를 얻고 내몽고 초원으로 식물탐사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몽고 초원의 해발고도는 1,300m ~ 1,700m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소로 고지대에 자라는 다양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백두산에서 만난 식물들도 볼 수 있었고 초원의 다양한 식물들을 만나며 식물탐사 여행을 하던 중 어느 지역을 지날 때 차창 밖에 습지가 보이고 그 습지에 흰색의 솜뭉치인지 양 때들의 털인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 왔지만 그해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고 다음해 다시 내몽고 초원을 찾아 식물들을 만나며 여행을 이어가던 중 지난해 그 습지에 목동이 양 때들을 몰고 와서 풀을 먹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차를 길가에 세우고 목동과 양 때들을 촬영하고 돌아서던 중 습지에 걸려있는 솜뭉치를 자세히 보게 되었다.

.

세상에나, 그것은 백두산의 습지에서 봤던 큰황새풀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달려갔지만 습지에 자라고 있는 큰황새풀은 손으로 만질 수는 없고 그저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감상하고 사진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총 7번의 내몽고 식물탐사를 다녀오면서 큰황새풀을 먼발치에서 감상하며 언제인가 긴 장화를 하나 구입해서 습지에 들어가 씨앗을 채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내몽고 초원에 지독한 가뭄이 찾아와 초원의 풀들이 푸른빛을 잃고 누런빛만 가득한 해가 있었다.

지독한 가뭄 속에서도 며칠 동안 초원의 꽃들을 찾아 탐사를 했지만 화려한 꽃밭은 가뭄으로 볼 수 있고 그늘지거나 약간의 습기가 남아 있는 장소에 아슬아슬하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야생화들을 만나며 여행을 이어가던 중 큰황새풀이 자라는 습지에 도착을 했다. 솜뭉치처럼 생긴 씨앗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고 습지의 물은 모두 말라붙어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

기회는 이때다 싶어 부지런히 큰황새풀을 카메라에 담고 안으로 들어가 한 웅큼의 큰황새풀 씨앗을 구할 수 있었다. 푸른 초원에 가득 피어있는 야생화 사진은 구하지 못했지만 말라버린 습지에서 귀한 것을 얻은 기쁨은 말로하기 어려웠다.

.

식물탐사를 마치고 돌아와 정성스럽게 파종상에 큰항새풀의 씨앗을 파종하고 긴 겨울이 지나 따스한 기운이 감돌 무렵 파종상에서는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사초과 식물의 특성처럼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잎이 조금씩 흙을 밀고 자라기 시작했다. 1~2년 후면 큰황새풀의 흰 씨앗을 고산지역이 아닌 집에서 감상할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내던 어느 날 파종상의 모습이 이상했다. 달려가 확인해보니 우리 마누라님께서 파종상에 잡초 같은 싹이 올라오고 있으니 몽땅 뽑아 내다버린 것이다. 언제 크나 지켜보고 언제 이식할까 궁리하던 큰황새풀은 잡초라는 오해와 함께 그렇게 마감이 되고 말았다. 너무 너무 아쉬워 빈 파종상에 물을 주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발아가 늦게 된 몇 개의 씨앗이 있었는지 삐죽삐죽 몇 촉이 다시 자라고 있다.

이것이 무탈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이 달리면 다시 한번 소식을 전해 드려야겠다고 생각중이다.

씨앗을 감상하는 큰황새풀이 잡초로 오해받지 않게 파종상에 큰 글씨로 이름도 써 붙여야 할 것 같다.

.

언제쯤 다시 자생지에서 큰황새풀을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름의 화려한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씨앗의 모습을 다시 볼 날을 기다려 본다.